“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이런 짧은 두 문장에도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는 질병처럼 읽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 아닐까요? 어린 시절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은 소녀는 헝가리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 남편과 어린 자녀를 데리고 스위스로 망명을 떠납니다. 정치 투쟁에 참여해 더이상 조국에 있지 못하고 망명객이 된 것이었죠. 다른 나라에 정착한다는 것은 모어(母語)인 헝가리어를 잃고 적어(敵語)인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적어?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해 그 언어를 정복하려는 “격렬한 전투” 과정을 거쳤기에 그는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고 불렀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하게 프랑스어가 적어인 이유는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크리스토프. 적어를 배워 어린아이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시를 쓰고 시 같은 소설을 쓰고 희곡을 쓰는 크리스토프.
그의 문장이 짧고 선명한 이유입니다. 풀어진 마음을 그의 단순한 문장에 내려놓았습니다. 읽고 써야 한다는 당위를 말한 바 없지만, 처음에는 모어로 망명 후에는 적어로 읽고 써 내려간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누가 읽는 사람이고 누가 쓰는 사람이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누가 읽으라고 해서 읽는 게 아니고 누가 쓰라고 해서 쓰는 게 아니라 질병처럼 읽고 호흡처럼 쓰는 사람이 독자이고 작가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슬픔을, 기억을, 역사를 담아 둘 방법이 없으니까요.
나의 책, 나의 삶, 나의 작가로서의 여정에 대해,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쪽)
소설가의 번역이어서일까요. 문장 하나하나가 착착 감기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낮은 음성이 제게 직접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번역가인 소설가 백수린의 목소리도 겹쳐서 들리는 것 같고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2~113쪽)
『문맹』을 읽고 더 어렵고 두꺼운 책을 찾아 읽을 힘이 나는 건 왜일까요. 크리스토프의 짧은 글이 더 긴 호흡의 의미로 저를 나아가게 했을까요? ‘문맹’으로서 ‘적어’와 격렬하게 전투하듯 써 내려간 그의 또 다른 프랑스어책이 저의 다음 책이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