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정말 혼자서만 하는 생각인데 오늘은 왠지 고백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사실 SNS 피드를 내리다가 ○0살 이상인 남성분들의 셀피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흠칫한답니다. 그분들의 외모가 문제일까요. 꼭 그런 거 같지는 않습니다. ○0살 이상인 남성 중 셀피를 올리는 사람이 많지도 않거니와 그걸 올리는 사람이 (제 기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있지도 않거든요. 셀피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찍어준 자기 사진을 많이 올리는 중년 이상의 남성 피드를 보는 일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예능에도 나오고 자기 전공 분야에서 교수를 할 정도의 중년 남성 셀럽이 젊은 여성과 아버지와 딸 콘셉트라고 찍은 사진을 올렸을 때는 솔직히 속이 좀 거북했습니다. 왜 저런 사진을 올리는 거지? 아니, 찍는 건 자유인데 왜 불특정 다수가 팔로잉하는 SNS에 자랑스럽게(!) 올리는 거지? (나 혼자 느낀 그 아저씨의 자랑스러움인지 몰라도 젊은 여성 배우와 찍은 사진을 올리며 자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그 아저씨들의 자의식 과잉을 느껴버리고 만 걸까요. 제 미적 감수성이 간절히 호소하는 바, ○0살 이상인 남성분들은 셀피를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지금까지 품고 있습니다. 사실 언팔하면 끝인 문제지만.
고백한 김에 혼자서만 하는 생각 하나를 더 하자면, “너도 나이 들어 봐. 그럼 이렇게 돼.”, “내가 나이가 들어서... 블라블라”, “나이 들면 이렇게 돼. (나를 쳐다보며) 너도 그렇지 않아?” (☛최악) 등의 나이 드립이 저는 정말 듣기 싫습니다. 일단 ‘나이’로 자기 상황을 모조리 해석해버리는 버릇이 보기 싫거니와 ‘나이’ 들었는데도 안 그런 경우가 많았던 저는 공감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나이’로 자기 자신을 혹은 타인을 어떤 한계 속에 가둬두는 그 생각이 숨 막힙니다. (그래서 독립잡지 <나이이즘>을 응원하며 언제나 구매하나 봐요. (다 읽지는 못함)). 얼마 전 일터에서 정신의학과 전문의 윤대현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분이 자기는 올해부터 “나이 들어서 그래.”라는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극 공감했더랬죠. 그 말은 셀프 가스라이팅이라나요? 그렇다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나이야, 가라~.’를 외치는 장면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좋아하는 게 뭐야?), 습관적으로 ‘나이’를 찾는 태도가 게으르며 자기 혐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훈훈하게 마무리해도 모자를 연말에 뾰족한 고백 두 가지를 하느냐고요? 그러니까 저는, 구태의연한 감수성과 언어로 구석구석 채워진 세상에서 조금 다른 감수성을, 우리 삶을 고유하고 아름답게 만들 오늘의 새로운 언어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열망을 가지고 있나 봐요. 누구보다 저 자신이 그 구태의연함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요. 그래서 밤마다 찾아 읽는 건 오늘의 가장 젊은 시집입니다. 여기서 ‘젊다’는 건 단순히 시인의 나이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젊은 시인의 시집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첨예한 언어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죠.
그렇게 찾아 읽은 오늘의 시집 중 하나가 신이인 시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 2023)입니다. 한 번 쭉 읽고 나서, 그 단어 선택과 주체의 자유로운 경계 부수기에 여러 번 소름이 돋았지만 다시 한번 읽으니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의 괴랄함이 왜 이렇게 친구처럼 다가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