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대륙과 대륙 사이를 옮겨 다니며 긴 시간 모습을 바꿔가며 살던 요정들.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한국에서 재회하게 된 요정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두장이 ‘안’과 작은 기업의 대표가 된 ‘미아’였죠. “많은 전쟁과 전염병과 홍수와 지진과 기근이 이 세상을 흔들고 뒤집고 부수고 재편”(33쪽)할 동안 인간 세계에 머물던 그들은, 한 몸이었던 요정 형제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갔지만 “함께한 기억의 누적이 형성한 특별한 이미지”(42쪽)만은 남아 서로를 알아보게 됩니다.
손으로 구두를 만드는 안을 찾아온 미아는 곧 결혼할 남자인 유진의 구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요. 자기 존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에 가까운 존재인 미아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부재할 연인’을 그리워하게 될 미래가 펼쳐질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유한한 존재인 유진을 붙잡는 선택을 합니다. 안은, 영원의 시간 동안 괴로워하게 될 사랑을 선택하는 미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두를 찾으러 방문한 유진에게 자신들이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말을 건네는데도, 그걸 그저 농담으로 여기는 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한의 존재인 미아가 유한한 존재인 유진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 작은 존재들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어요.
밤공기 속에서 그의 발이 닿은 자리마다 음표가 만개하며, 그 위에 올라탄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미아가 오랫동안 못 보아 어느새 잊었던 미립자에 가까운 존재들, 포화에 사그라지고 환한 전깃불에 스며들거나 문명의 소음에 부서졌으리라 짐작하며 기억의 갈피에 접어두었던 이들이 새삼 나타나서는 탄금하듯 음표 위를 뛰어다니며 스타카토의 일부가 된다. (77쪽)
무한한 존재(미아)가 유한한 존재(유진) 안에서, 잃어버렸던 ‘작은 존재들-요정-정령’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건 기적과 신비가 사라진 세계에 찾아온 또 다른 세계의 시그널 같았을 거예요. 그 또 다른 세계는, 만날 수 없는 세계에 있던 두 존재가 서로를 발견하는, 그러니까 ‘사랑’의 상징 같이 다가오기도 했어요. 미아의 어리석은 선택에 재를 뿌리고 싶어하는 안조차 유진이 무대에서 발레를 하는 걸 본 순간 그 작은 존재를 발견하며 소설은 끝나는데요.
안은 유진의 움직임 속에 같이 움직이는 작은 존재들을 보며, 언젠가는 부서지고 말 존재의 아름다움을 수긍해요. 그러면서 40여 년 전 자기가 버린, 우연히 구두를 사이에 들고 만나게 된,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합니다. 그녀의 사라져가는 시간을, 닳아져 가는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 보아주는 게 자기의 몫임을 깨달은 거죠.
유진의 손짓이 머무는 곳에, 발끝이 닿은 자리에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작은 존재들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정말로 보이지 않는 걸까.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 오래되어 확신할 수 없으나 분명 인간의 지식으로 판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무대를 서성이고 있다. 그 존재들은 처음에는 어떤 회의도 불신도 반감도 갖지 않은 빛으로만 감지되었다가 파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소리와 냄새로도 느껴지고, 어느 때는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었다가 타오르는 횃불이었다가 녹아내리는 눈송이였다가 하면서 속성을 자유로이 바꾸더니 다음 순간 리듬과 박자를 갖춘 음악이었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169~170쪽)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 같은 존재를 타고, 안과 미아는 선택합니다. 아마도 ‘사랑’을요. 미아가 유진을 바라보는 시선, 안이 이름을 잊었던 그녀의 사라져가는 시간을 끝까지 바라보기로 결심한 순간 같은 건, 어쩌면 무한하다고 여겨지는 신이 유한한 인간을 바라보는 마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사그라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피와 뼈를 가진 육체이자 현재의 존재인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무용한 몸짓을 하겠다는 결심. 아마도 ‘사랑’인 마음.
“무한의 무력한 응시와 고민 속에 비로소 바로 그 유한성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있다고, 곧 바로 그 사멸하는 유한성 안에서야 비로소 저 무한성은 비로소 전능해지는 것이라고,”(187쪽)
무한한 존재의 끈질긴 응시. 왜 12월 밤에는 그 응시가 더 뜨겁게 느껴질까요.
p.s. 소설이지만 한 편의 서사시로 읽어달라는 구병모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어요. 긴 겨울밤, 누워서 보아도 좋을 작은 책을 안고 선물같이 펼쳐진 한 편의 서사시를 품어봐도 좋을 거 같아요.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두 호흡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