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의 어느 날, 즐겨듣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다룬다고 했을 때, 왠지 이 영화는 꼭 먼저 본 후 팟캐스트를 듣고 싶었습니다. 가까운 극장의 영화 시간표를 찾아보니, 돌아오는 주간 평일에만 볼 수 있더라고요. 과연 내가 평일에 영화 보러 갈 시간을(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헤아리며 제가 참여하는 책 팟캐스트를 녹음하러 갔습니다(팟캐스트 라이프). 그런데 마침 함께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출판 마케터이자 부지런한 문화 향유자 제이 님(@jay.walking.again)이 <괴물>이 ‘올해의 영화’라며 꼭 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망설이던 마음에 가벼운 한 마디로 살짝 등 떠밀어주신 거죠 (움직일 때 수많은 이의 등 떠미는 행위가 필요한 1인).
그렇게 혼자 <괴물>을 1회차로 보고 두 소년, 요리와 미나토의 세계에 푹 빠지고 말았어요. 아니, 요리와 미나토의 아름다운 슬픔의 세계에 빠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버려진 열차 한 칸을 아지트 삼아 오롯이 둘이서 만들어가는 세계는 누가 봐도 어른들이 꾸민 인위적인 판타지 공간이었지만 제게 그런 설정은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평론가가 아니고 그저 요리와 미나토가 느꼈을 혼돈의 시간을 함께 경유하는 폐열차의 승객이었으니까요. 폴과 <괴물> 2회차를 보면서는 3부 이야기가 시작될 때쯤부터 계속 눈물이 나왔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자기 마음이 뭔지도 모르겠고 아직 다 이해하기 힘든 세계에서 나름의 빛을 발견해나가는 소년들의 여정을 알고 뒤따라가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영화와 관련해 이런저런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읽고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떠올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기차, 오롯이 자기 둘만의 세계를 만드는 두 소년, 외로움, 밤, 그리고... 슬픔의 정서. 감독은 두 소년 배우에게도 이 작품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해요. 아동문학가 권정생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쓸 때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미야자와 겐지였으므로, 그의 <주문이 많은 요리점>, <비에도 지지 않고> 등의 작품은 읽었는데 왜 아직도 <은하철도의 밤>을 읽지 않고 있었을까요.
그렇게 읽은 이 무국적의 아동문학에서 조반니와 캄파넬라를 만났습니다. 아픈 엄마와 함께 사는 외톨이 조반니와 그런 조반니에게 늘 시선을 두고 있는 인싸 캄파넬라. 요리와 미나토처럼, 남들 앞에서는 둘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지만 둘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서로에게 시선을 두는 그런 사이입니다. 우유가 흐른 자국 같은 ‘은하’에 대해 배운 날이자 친구들은 모두 ‘켄타우루스 축제의 밤’에 놀러 가던 날 밤, 엄마에게 드릴 우유를 찾으러 홀로 목장으로 갔다가 검은 언덕마루에서 천기륜 기둥을 만난 조반니. 밤의 언덕에서 ‘은하 역, 은하 역’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우연히 은하철도에 탑승하게 됩니다. 타고 보니 기차에 캄파넬라가 창밖을 보며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둘은 은하 역에서 시작해 백조 역과 북십자 역을 거쳐 남십자 역까지 함께 여행합니다. 열차에서 승무원, 새잡이, 등대지기, 플라이오세 지층을 탐구하는 학자, 타이타닉 호에 탑승했던 가루오와 가루오의 어린 남동생, 청년 가정교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로운 경험도 하고요.
고요한 밤을 통과하는 열차 속 승객들에게서는 뜻 모를 슬픔의 정서가 흐르는데, 그 정서는 언제나 외로운 조반니의 것이기도 하고 뭔지 모를 비밀을 품은 캄파넬라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 뜻 모를 정서의 정체는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물론 어느 순간 독자들은 눈치를 채게 되지만요. 루시드폴이 이 작품을 읽고 만들었다는 ‘은하철도의 밤’을 무한 재생하며 이틀 밤 꼬박 이 작품에 빠져 있다 보니, 저도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을 다녀온 듯 마음이 이상하게 부풀어 오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