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마지막 날, 인후염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재택근무를 신청했습니다. 그냥 연차를 내고 쉬면 될 일을 굳이 재택근무를 한 이유는 그날이 월말인 급여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급여를 지급하기 2~3일 전부터 각 직원의 근무일, 연차, 연장근무시간 등 노무 관련 업무를 정리하고 말일에 급여 지급 관련 업무에 박차를 가하는 회계 직원의 맥락과 고단함을 알기에 차마 말일에 연차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연차를 내지 않고 집에서 일하겠다고 무리하는 저를 제 상사는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저는 알거든요. 악의 없이 순진한 상사들이 말일 전날에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연장 근무를 신청해 말일에 출근한 회계 직원을 절망(?)에 빠뜨리는 그런 일들을요. (그 악의 없는 순진함은 직급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유난한 사람이 되고, 많은 서류 작업을 만들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뭐, 할 일도 많았지만요.
각설하고, 아파서 힘이 쭉 빠져서 일할 때 그림 하나가 마음속에 계속 떠올랐습니다. 3년 반 전, 팬데믹 직전에 다녀온 콜마르(Colmar) 운터린덴 박물관(Unterlinden Museum)에서 만난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입니다. 운터린덴은 13세기에 도미니크 수녀들이 살던 수도원이었는데 1849년에 종합 박물관으로 개관했답니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곳이어서인지 내부 구조가 복잡하고 뭔가 은밀하며 차분한 공기가 흐르던 곳으로 기억합니다.
이 박물관의 대표작이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aünewald)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입니다. 이 그림은 알자스 지방 이젠하임의 안토니우스파 수도원 병원 예배당을 위해 제작된 대형 접이식 제단화에요. 그 병원은 페스트와 ‘성 안토니우스의 불’(맥각균에 오염된 곡물로 야기되는 병이며 사지에 매우 고통스럽고 타는 것 같은 느낌을 줌)에 걸린 환자, 한센병과 괴저병 등 피부 관련 질환을 앓던 환자를 돌보던 곳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부를 마치 피부질환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고 봅니다. 아마 수도원 병원에 모여있던 환자들은 자기들과 같은 모습으로 죽어가던 그리스도를 보고 큰 위로를 받았을 거고요.
2019년 여름에 저는 무척 지쳐있었어요. 그때 영성가 헨리 나우웬의 <사랑의 담아, 헨리>(헨리 나우웬, IVP, 2019)를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 언급된 이젠하임 제단화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그 제단화가 건네는 위로를 받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추석 연휴 앞뒤로 연차를 붙여 계획하던 유럽 여행에 콜마르를 넣었어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된 ‘쁘띠 베니스’가 있는 도시로도 유명한 콜마르에 이젠하임 제단화를 보러 간 것이죠. 실제로 마주한 제단화는 그 스케일이 엄청나 위로보다는 압도를 당한 기억이 나는데요. 이 그림은 오히려 이후 서울에 돌아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더 자주 생각나 제 마음 깊은 곳을 만져주었습니다.
2019년 9월 이후, 3년 반 동안 쉼 없이 일하다가 잠깐 멈춰 선 자리에서 생각난 콜마르의 운터린덴 박물관 그리고 이젠하임 제단화. 이 그림을 나누며 새로운 시작인 3월의 문을 열고 싶어졌어요. 한없이 화창하고 청량했던 9월의 콜마르도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