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의 세계와 결별해야 한다. 세계가 너무 오랫동안 아저씨의 세계로 공고화되어 있어 완전한 결별은 불가능할지언정, non-아저씨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완전히 탈아저씨 세계할 수 없으므로 덜 아저씨 세계와 현실적으로 거래(!)하며 non-아저씨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non-아저씨 세계를 넘어 이름을 명명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으로서 1차 목표는 벗어나는 데 있다. 아무리 진보 혹은 여성주의적 시각과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아저씨들도 결국 아저씨는 아저씨다. 그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도 모르는 한계에 갇혀있는데 그들에게 어떻게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당사자의 언어와 세계 구축이 절실하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서 적은 글입니다. 그 전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례한 아저씨의 향연 속에 마음에 슬픔이 차올라서 출근하자마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왜 너는 그런 사소한 일에 슬퍼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 슬픔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아저씨들(로 대변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보는 일은 누군가의 일상을 어둡게 만들고 누군가가 늘 폭력의 세계에 노출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한 장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분노와 슬픔이 차오를 때 고정희의 시를 읽었습니다. 우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가득했습니다. 그 하느님은 아버지와 할머니와 어머니의 눈물을 함께 우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세계의 재난 속에서도 함께 울었습니다. 내 사소한 슬픔에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 지구 다른 편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우는 곳으로 날 데려다주었습니다. 이미 앞서 아저씨의 세계로 대변되는 세계에서 분투하며 길을 내었던 여성들의 세계로 날 데려갔습니다.
고정희의 세계는 그렇게 종으로는 역사를, 횡으로는 인류를 함께 품을 수 있게 만드는 드넓고 다정한 언어였습니다. 세계와 역사에 흐르는 큰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시인을 따라 귀와 눈을 열어 내 사소한 아픔을 품고 큰 세계로 걸어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 모닥불을 지펴놓고 /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_고정희, ‘땅의 사람들1–서시’ 중 일부.
아직 서늘한 2월, 내 몫의 봄소식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그 소식이 흔들리지 않도록 못질을 시작하고 싶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