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_글자 그대로 ‘사람을 만난 이야기’, 일종의 탐방기이다. 자기 몫의 삶을 진솔하게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 인간상을 찾아, 그들의 숨겨진 진실과 아픔, 따스한 체온과 숨결을 채록해 보려고 한다.
이렇게 소박한 소개에 맞춰, 창간호가 처음 만난 ‘우리 시대의 전형적 인간상’은 파출부로 일하는 한 여성이었습니다. 1938년 조치원에서 태어나 당시 나이 51세였던 임순옥 씨는 15년이 넘도록 YWCA 소개로 파출부 일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당시에는 혼자 사는 부자(!) 할머니 한 분의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같이 잠을 자고 오전 두 시간 동안 청소를 한 후, “조반”을 차리고 화초에 물을 주고 정기적으로 저녁 손님을 위해 음식 준비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월 15만원을 받고 삶을 꾸려나가던 임순옥 집사는 이런 고백을 해서 사람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에는 정말 죽을 힘도 없을 때가 있어요. 빨래를 손으로 부비다 너무 힘이 들면 서서 발로 밟아요. 밟으면서 힘을 달라고 막 기도한다구. 왜, 기도가 생활이 돼야 하고 생활이 기도가 돼야 한다잖아요? 나는 그걸 ‘수요강좌’에서 문목사님한테 배웠어요. 눈 감고 무릎 꿇고 앉아서 하는 것만 기도가 아니라고, 생활하면서 언제나 기도하고 또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구요.”
스물다섯에 소개로 만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알콜 중독자였고 직장도 없었다는 이야기, 그 와중에 딸 셋을 낳고 아들 못 낳은 것 때문에 구박받은 이야기, 남편이 병들어 병원비 내고 이자 갚는데 파출부 벌이를 다 써버린 이야기, 마흔한 살에 과부가 되었지만 “남편이 죽고 나서” 생활이 나아지기 시작한 이야기, 열두 살 때부터 공장을 다녔고 어릴 때부터 가난에 시달린 이야기, 부인과 질병으로 고생한 이야기, 그 와중에 신앙에 의지한 이야기까지.
<살림>이 채록한 임순옥 집사의 삶은 그저 글자로만 읽는데도 그 가난과 질병에 내가 시달리듯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고통스러웠죠. 우리 할머니, 혹은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드라마에 아니면 한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친척 혹은 지인의 이야기로 들어 봤음직한 익숙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기도 했습니다. 1960~80년대를 건너온 여성들의 삶에 빠지지 않는 가난과 사기 결혼과 알콜 중독 남성이라는 클리셰.
이 글을 읽고, 제 서재의 가장 소중한 책 중 한 권인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 엮음, 민중사, 1987)를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정희진 선생님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 하나의 문화, 2001)를 들춰보기도 했고요(이 두 권의 책은 모두 품절 상태입니다. 이런 연구들이 오래 읽히고 남겨졌으면 좋겠는데…). 빈곤과 여성의 관계 거기에 얽힌 폭력 문제를 정밀하게 들여다본 두 권의 연구서입니다. 이 글들을 앞에 두고, 흔들림 없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가부장제를 생각했습니다. 시대별로 양상은 달라지지만, 여성들 특히 가난한 여성의 삶의 플롯에 클리셰가 범벅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 혹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고한 구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개인이 말하면서 그것이 집단의 경험임이 밝혀지곤 한다.”(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한겨레출판, 2019, 18쪽)
‘알콜 중독 남편도 없고, 아직까지는 부인과 질병에 시달리지도 않으며, 배울 만큼 배운 여성인 내가 겪는 오늘날 가부장제의 문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저는 몇 가지 경험을 적어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 시대 클리셰가 다수 떠올랐습니다. 소설가 강화길의 작품이 지금 여성 삶의 클리셰를 잘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고요.
‘파출부 임순옥 집사 이야기’는 결코 2023년의 제 이야기는 될 수 없지만 정확히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임순옥 씨의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날, 혼자 이런저런 숙제 목록도 만들어보았습니다. 우리 세대의 그리고 다음 세대의 여성은 다른 기록을 남겨야 하니까요. 1988년의 삶에 응답할 일은 이렇게 여러 빛깔입니다.
‘우리 시대의 전형적 인간상’으로 ‘임순옥’이라는 여성을 만나 기록으로 남겨준 것만으로도 <살림> 1988년 창간호는 저의 소중한 과월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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