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전을 읽고 자란 저는 ‘인물전’을 읽고 자라는 오늘의 어린이들이 부럽습니다. 이순신, 강감찬, 나폴레옹 같은 전쟁영웅이 주된 라인업을 이루고 퀴리 ‘부인’과 헬렌 켈러 정도가 감초로 끼어있던 위인전이 아니라 마리 퀴리, 클레오파트라, 선덕 여왕, 김만덕, 이태영, 제인 구달, 박완서가 당당하게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인물전’을 읽는 오늘의 어린이들. 부러운 마음에 비룡소의 ‘새싹 인물전’ 시리즈를 간간이 찾아 읽어본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읽은 <허난설헌>은 이 시리즈 중에서도 단연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엄마 냄새 참 좋다>(창비, 2014)라는 작품집으로 생존을 위해 애쓰는 현대와 역사 속 여성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냈던 유승하 선생님이 이 책에 그림을 그리셨기 때문이죠. 이미 그 작품집에서 강주룡과 허초희를 진하게 만났었기에 이후에 읽은 <체공녀 강주룡>(박서련, 한겨레출판, 2018)이나 오늘의 어린이책 <허난설헌>이 겹겹이 큰 의미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허난설헌>에 실린 허초희(‘난설헌’은 허초희의 호)의 이야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놀라움으로 읽었지만, 그 어떤 페이지보다 여기에서 저는 허초희의 허초희스러움을 보아버렸답니다.
“초희는 자신을 ‘인간 세상에 잠시 머무는 여자 신선’이라고 상상했어요. 그래서 시를 쓸 때면 꽃 모양으로 장식한 관을 머리에 쓰고, 책상 앞에 향을 피웠어요.”(32쪽)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선녀인 줄 아나 보지?’라며 비웃고 그 유별남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상상의 세계를 그리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는 허초희. 꽃 모양으로 장식한 관을 머리에 쓰고 향을 피운 채, 이후 동아시아가 놀랄 시를 쓸 허난설헌, 초희를 생각하니 그 발랄한 창의성과 상상력에 친구를 만난 듯 마음에 어떤 감정이 차오릅니다. 허초희가 동시대에 살았다면 SNS 혹은 유튜브를 재기발랄하게 활용할 시인이었을 것 같아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북하우스, 2022) 라는 책 제목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초희가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세계에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초희의 꿈은 저만치 멀어져”만 갔다죠. 자기의 문재(文才)를 아껴주던 오라버니 허봉이 죽고, 기쁨을 주었던 두 아이도 앞서 보내며 시름시름 마음의 병을 앓던 허초희는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납니다. 천 편이 넘는 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 달라는 말을 마지막 부탁으로 남기면서요. 사람들이 여자가 지은 시라며 낮추어 보거나 헐뜯을 것을 염려해서라는데요. 이 대목에서 저는 더욱 허초희에게 마음을 빼앗겼어요. 슬픔과 체념으로 포위당했을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결단력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이 언니 좀 많이 멋있...)
다만 천재(!) 동생을 둔 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을까요? 그의 동생 허균이 자기가 외우고 있던 누나의 시와 집에 남아있던 시를 정리해 <난설헌집>을 묶어 세상에 내보냈으니까요. 허균 덕분에 오늘의 우리는 난설헌의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와 적대적인 세계에서 살아남은 인물의 얼굴과 슬픈 마음이 시로 승화되는 여정을 따라가 보고 싶으시다면, 난설헌 허초희를 만나보셨으면 좋겠어요. 그의 아름다운 시는 직접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