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귀신>에는 이런 타이완의 근현대사를 온몸에 새긴 여자 귀신 다섯이 나옵니다.
➊ 나라의 동쪽 ─ 정번파의 귀신
➋ 나라의 북쪽 ─ 대나무의 귀신
➌ 나라의 중심 ─ 불견천의 귀신
➍ 나라의 남쪽 ─ 임투 숲의 귀신
➎ 나라의 서쪽 ─ 여행하는 귀신
관습에 따라 ‘동서남북중’의 순서가 아니라 ‘동북중남서’ 순서로 ‘귀신의 나라’를 형성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알레고리입니다. 이 순서는 타이완의 발전과 관련이 있어요.
“즉 각각 배열된 방위의 순서대로 보자면, ‘원주민, 중국과의 관계 시작, 타이완 본토의 발전, 국경의 남쪽, 타이완에서 바라본 중국’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¹
이번에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이 땅에 원래 ‘핑푸족(平埔族)’이라는 원주민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타이완 역사는 한족이 이주해오면서 겹겹의 지배 역사를 형성하게 됐는데 이 책의 첫 여자 귀신인 ‘정번파의 귀신’ 월진/월주는 원주민과 붉은 머리 지배자(네덜란드인) 홍모번의 혼혈 그리고 다중 혼혈입니다(귀신 이름이 중복 표기인 건, 귀신이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집단의 기억이라는 의미일 테죠). 월진/월주는 한인(漢人)에게 쾌락을 제공하다가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생계유지가 어렵게 되자 자기 땅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 땅을 되찾으려 한 원주민인 월진/월주는 한인에게 난도질당하고 불결한 몸의 대명사가 되어 길가에 버려지죠. ‘나라의 동쪽-정번파의 귀신’에서 원주민 여자 귀신 이야기로 타이완 역사를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 작가는 원주민 지배자였지만 중국 본토에 대해서는 피지배자로서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타이완의 한인 여성 귀신 이야기를 다음으로 풀어냅니다.
청 제국 때부터 ‘타이완’으로 불리기 시작한 타이완 본토의 투쟁 역사를 기록한 ‘불견천의 귀신’ 월홍/월현(선)은 부랑아/불량배가 퍼뜨린 루머 때문에 가문으로부터 우물에 몸을 던지는 자살을 종용받고 죽은 여자 귀신입니다. 타의로 자살한 귀신이 되어서는 장서각에 은신하며 경서와 철학서, 역사서를 읽습니다. 귀신은 처음엔 익숙한 경서 종류를 읽다가 가진 게 시간밖에 없던지라 장서각의 “한가한 책”을 읽거나 책 안쪽 별도의 쪽지에 적혀있던 글과 음란한 책을 섭렵하며 폭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경서에서는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자기 죽음의 의미를 한가한 책에서 발견하죠.
“여자 귀신이 섭렵한 책 중에는 한가한 책들도 있었다. …이제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가족들이 추종한 것은 ‘천조’의 유풍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을 시문에 능하게 했던 것은 부친과 오빠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였고, 그 후에도 계속 시문을 연마하게 한 것은 남편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상들을 빛내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가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기풍이었던 것이다.”(155~156쪽)
지성 넘치는 이 여자 귀신은 타이완이 중국 본토보다 더 엄격하게 삼강오륜 전통을 숭앙하다가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걸 깨닫고 의기소침해집니다. 의기소침해진 귀신을 기록자로 일으켜 세운 건 “거리를 가득 메운 떠돌이 혼귀들”이었습니다. “영원히 평안을 구할 수 없는 혼귀들”이 원혼이 되어 허공을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자 귀신은 문득 궁금해집니다. 궁금증은 여자 귀신을 취재(!)하게 만들고 공부하게 만듭니다. 중국의 통치 세력이 타이완에 내려온 뒤로 212년 동안 ‘대규모 반란’이라 불릴 만한, 청 조정에 대한 항쟁이 무려 열여덟 차례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귀신은 이를 기록해야겠다는 의지에 불타오르죠(우물에 빠져 죽어 축축한 물기를 머금었던 그 귀신이...!).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를 계발해 지성을 갖추고 그 땅의 역사를 끌어안으며 자기 피로 불견천 천장에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 여자 귀신의 멋짐이란.
“귀신은 대규모 전투와 대량 학살, 피살된 인원수, 훼손된 정원, 약탈된 물자의 내역도 기록했다. 이 모든 것들이 거리에서 들리는 이야기나 민간에 전해지는 소문을 기초로 수집한 것이었다.”(199쪽)
‘불견천의 귀신’이 기록함으로 존재의 해방을 이룬다면 ‘나라의 서쪽-여행하는 귀신’은 자기를 죽인 남편을 찾아 어렵사리 배를 타고 중국 탕산으로 건너가 복수를 감행한 후, 배를 타고 항해하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자유를 누립니다. 몇백 년을 살며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하다 보니 큰 새의 뱃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걸 보기도 하면서요. 언젠가는 사람이 탔던 그 새를 꼭 한 번 타보고 말겠다는 새로운 기대를 품는 이 여자 귀신은 이후에 비행기를 탔을까요? 자기를 죽인 남편을 찾아 먼 길을 떠나 끝내 남편에게 복수하는 여행 귀신의 여정이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최근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 있나 싶었답니다.
여자가 죽는 이유가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유구하게 공통적인 현실에 답답하다가도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여자 귀신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해방을 이루는 결말에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죽은 후에서야 춤추고 노래하고 공부하고 복수하고 여행할 수 있게 된 여자 귀신들은 원혼의 가장 안전한 선택지인 ‘윤회’를 거부하고 각자 자기 욕망을 따라 자기 해방을 만들어갑니다. 여자 귀신이 만든 해방의 길은 그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타이완의 과거와 현재 또한 구원하는 장면들에 뭉클했고요. 여성이 죽임당하는 역사 문화적 맥락을 타협 없이 드러내면서도 활기찬 여자 귀신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에 감복했고 그 거침 없는 필력에 홀딱 빠졌습니다.😘
그러면서 타이완에 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글이 길어 다 이야기하지 못한 또 다른 역작 <귀신들의 땅>을 쓴 천쓰홍과 <눈에 보이는 귀신>의 리앙이 태어난 장화현이 너무너무 궁금해졌거든요. 중국어권 문학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네요.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 두 번째 책인 찬쉐의 <마지막 연인>(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은행나무, 2022. 원제 : 最后的情人 (2005년))이 제 책상 위에서 대기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