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안윤, ‘달밤’, 『방어가 제철』, 30쪽.
연말연시를 지나며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옛 지인들이 안부를 전해옵니다. 멀리 바다 건너로 이민 간 선배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약하고 연약한 아기 예수로 오심을 마음속에 새겨 보자구. 부자가 되고, 교인 수가 많아지고, 건물이 커지는 것 안에 예수가 안 계시고, 낮아지고, 조용해지고, 복음에 집중하는 것에 예수가 계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음, 기쁜 성탄이야!”라며 성탄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북미대륙 북서부 해안 도시에 사는 선배는 지금 학교에서 ‘Custodian’으로 일한다고, 학생들이 떠나면 교실 복도 청소하는 일이라며 자상하게 근황을 소개합니다. 어쩌면 고단할지도 모를 이민 생활 가운데에서도 후배의 안부를 먼저 챙기니 그저 송구… 부끄…. 일 때문에 한국 나오기 힘든 상황이라기에, “제가 한 번 가겠습니다!” 말씀드리니 오기 쉽다고 하네요. 표 끊고 인천 가서 비행기 타고 오면 된다고. 뭐, 14시간밖에 안 걸린다고. 게스트룸 청소해 놓겠다고. 너무 쉬워서 한 번 가려고요. 마거릿 애트우드와 앨리스 먼로와 얀 마텔의 나라로.
올해로 17년째 옆 나라 항구도시에 사는 선배도 명절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다가 내일 떠난다며 연락합니다. 타국에서 특정 목적을 두고 보상 없는 일에 삶의 내용을 채우며 사는 선배와 그 가족이 보고 싶어 이번에도 조만간 한 번 가겠다고 약속합니다(실은 이번 봄에 가려고 했던 도시의 옆 도시이기도 해서...👉👈). 제가 정말 갈 수 있을까요? 영화 <장한가> 속 붉은 매혹의 도시, 그곳으로.
대학 때, 국문과를 다니던 한 선배가 글에서 ‘내 몫의 삶’이란 표현을 썼던 걸 기억해요. 그때는 그 표현이 마냥 멋있어 보여서 그 발음을 입속에서 굴려보곤 했었는데 이후 지극히 평범하며 (내 입장에서) 맥 빠지는 선택을 한 선배가 스스로 작게 만든 삶에 그 표현을 쓴 거 같아 불만을 품기도 했어요. 내 몫은 이만큼이니 난 이렇게 살게 놓아두라는 의미인가? (언니는 대학 졸업하던 해에 바로 결혼을 선택했답니다). 사회에서 분투하며 멋지게 자기 자리를 찾아갈 여자 선배라 생각했는데 그건 저 혼자만의 기대였고 그림이었죠.
저의 이런 마음은 최은영 작가가 그려낸 작품 속 인물의 마음과 겹칩니다. 최은영의 ‘몫’이라는 단편에서 해진은 기지촌 활동가로 살아가는 친구 희영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요.
“난 네가 글쓰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