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읽는 밤
<난간 위의 고양이>, 박서원, 세계사,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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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 선 사람은, 진흙탕을 뒹구는 비명의 언어로만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적 없지만 나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의 속살에서 ‘악’의 얼굴을 친숙하게 발견하고, ‘폭력’의 기미를 재빠르게 포착해온 사람이 당신이라면 박서원의 시집은 당신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는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박서원의 언어는 당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시 안에서 솔바람소리와 오월의 미풍과 치자꽃 향기를 만나고 싶다면, 당신은 이 시집을 펼쳐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시가 어떤 종류의 영혼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시가, 언젠가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는, 진흙탕을 뒹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젠가 천사의 방언을 얻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는, 비명과 신음과 웅얼거림을, 그 결핍의 언어에 성실하게 매어 달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경련하는 언어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줄 것이다.”
_시인 김정란의 해설 ‘신성한 피-경련하는 언어, 제의의 성전(聖殿)인 육체, 무시무시한 두께인 내면’ 중에서.
오로지 배반당하고 거절당한 이의 내면에만 가닿을 시. 실패할 것을 알고 매일 자기 몸이 절단당하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이가 그려내는 이미지.
꿈은 톱날, 찬란했네 머릿속 깊은
경련의 갈대숲으로 네 갈래
떨어져 나가는 팔과 다리
나는 길가에 버려진 헌 구두처럼 굳게
침묵했네
침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겨울 비오는 밤의 외투였던
내 고요한 타락을 위해서
바로 나였던 네 토막의 새로운 비명을
위해서
_박서원, 날마다의 꿈, 나의 절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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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합니다. 왜 많은 시에서 몸이 잘려 나가고, 신을 향해 욕하고, 버려진 헌 구두 같은 상태로 절규하는 시들이 제 마음에 전적으로 스며들까요. 밤마다 책을 찾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 머리맡에 두고 언제든 꺼내 읽을 시집을 찾아 헤매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낮의 시간에 사용한 체제의 언어들은 내 잘려 나간 마음의 심연을 건드리지 못했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체제 속에서 늘 배제되고 있다는 감정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인가 봅니다.
안개가 낄 적에는 모든 길은 하늘로 향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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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안개가 자욱해질수록 길은 넓어지고 하늘은 펼쳐지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네 갈 곳을 정해야 해. 하지만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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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박서원, 안개의 길
그래도 시인을 따라, 안개 낀 길을 걸을 때도 모든 길은 하늘로 향한다는 듯 고개 들고 무턱대고 걸어가 보고 싶어집니다. “하느님이야 오시거나 말거나, 나는 그이를 향해 무턱대고 간다. 배반당할 각오를 하고, 나는 그 어리석음의 힘으로 산다. 박서원이 그러듯이.”(김정란, 위의 글).
대림절기 첫째 날, 박서원의 피비린내 나는 시에 누워 절단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어봅니다.
12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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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절판 시집 전시를 기획하다가 오래된 문예지들의 시집 서평 몇 편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창작과 비평> 1996년 봄호에 황현산 선생님이 쓰신 서평 ‘여자의 말 여성의 목소리-김경미 박서원 이선영 시집’이라는 글을 발견했지요. 황현산 평론가가 말하는 박서원 시인이라. 정말 궁금한 조합이었습니다. 마침 이 글에서 황현산 선생님은 박서원 시인의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평론에서 밑줄 그었던 부분은,
이 시인은 그러나 「무덤으로부터의 유년」에 따르면 “양수 속에서부터 어른”이다. 가장 평화롭고 무구했던 그 순간에 이미 세상의 음모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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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혐오했던 보들레르에 따르면 여자는 정신의 귀족주의자인 당디(DANDY)가 될 수 없다. “여자는 ‘자연적인’ 것, 다시 말해서 추악한 것이다. 따라서 여자는 항상 속된 것, 다시 말해서 당디의 반대이다.” 그러나 박서원이 꿈꾸는 것은 바로 여자 당디가 되는 일이다. 그것은 여자 만들기의 음모에 자신의 여성 전체를 걸고 저항하는 일이며, 세속화의 프로그램에 단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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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평론을 읽고 좀 놀랐습니다. 제가 박서원의 시집을 읽고 느꼈던 어떤 막연한 공감의 정체가 정확히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시집 읽는 밤’에서 “누가 가르쳐준 적 없지만 나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의 속살에서 ‘악’의 얼굴을 친숙하게 발견하고, ‘폭력’의 기미를 재빠르게 포착해온 사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곧 “가장 평화롭고 무구했던 그 순간에 이미 세상의 음모를 간파”한 사람이니까요.
태어나자마자 누구도 세상이 네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네 존재 자체가 음모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해준 바 없지만, 저 또한 양수 속에서부터 어른이 되어 감각한 세계의 정체는 바로 박서원이 감각한 그 참혹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서원 시인의 비명 소리 같은 시어에서 비로소 안식할 수 있었나 봅니다. 시인이 부지런히 비명을 내지르며 “무정형의 괴물”과 싸운 덕분에요.
이 시집이 출간되던 당시 동시대 평론가였던 황현산 선생님은 누구보다 밝은 눈으로 이 시집을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27년이 지나 이 글을 읽고 조금 안도했습니다. 같은 시대에 시인의 시에 숨은 의미를 읽어준 평론가가 있었으니, 시인이 조금은 덜 외롭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하면서요.
1995년에 ‘여자 당디’를 꿈꾸던 박서원 시인은 지금 세상에 없습니다. 황현산 선생님도 안 계시고요. 그러면 2022년, ‘여자 당디’에 가까운 작가는 누구일까요? 그들의 책을 찾아내 소개하고 싶은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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