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같은 전 세계적 이벤트가 열리면 먼저 설레고 기대되는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K-리그 경기는 하나도 챙겨보지 않으면서 카타르로 떠난 국가대표 축구팀의 일거수일투족에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거대 이벤트 이면에는 누군가가 착취당하고 배제되는 일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는 걸 알면서도 이벤트 전면에서 빛나는 사람들과 드라마틱한 승부 세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다가 202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의 선전을 염원하며 다시 소환된 2002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뒤적이다가 20년 전 한일 월드컵 당시 <아웃사이더>에 실린 두 명의 시선과 만났습니다.
-. 대중의 열기에 휩쓸리지 말고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청하는, 조금은 경직된 글
지식인들은 이 현상에 숨어 있는 위험한 냄새를 맡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혹 그것을 알아채고서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축구 축제에 대해서는 따지고 넘어가야 할 일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소리 지르고 춤추는 과잉의 동작 속으로 빠져볼 필요가 있다”(도정일, 「지금은 축제의 시간」, <한겨레> 6월 17일)면서 물러서는 것은 당신들이 할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았다가 인권운동사랑방이나 몇몇 지식인들이 엄청난 곤욕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마당에 사회의 대세에 합류해서, 그렇잖아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 비판자들에게 ‘엘리트주의’와 ‘권위 의식’의 딱지를 붙이거나 ‘일단 즐기자’며 외면하는 것은 황당하다. 파시즘의 특징 중 하나가 ‘(말 많은) 지식인에 대한 혐오’라는 것을 굳이 얘기해야 할까?
_문성욱, ‘붉은 악마, 그 섬뜩한 순수’, 65~66쪽
-. 현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하지만, 축제가 주는 환상의 전복적 힘을 긍정하는 글
붉은 악마의 열정이 자본과 권력에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지적과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를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제기된 것으로 안다. 붉은 악마 현상이 축제에 상응한다면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환상과 축제의 근본 속성이, 완벽한 상징 질서와 완벽한 통합이란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복적인 측면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제 축제는 끝났다. 축제에 묻힌 사안이 없는지 되짚어보고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다시 직시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벗어나려고 했던 곳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충동질했던 그 알 수 없는 들뜸은 환상이었겠지만,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환상에 모욕을 가할 권리가 없다. 동일하게 느껴질지라도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환상의 자존심이다.
_권명환, ‘환상의 자존심’, 79~80쪽.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권명환의 시선을 수용하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아니, ‘논의’라는 것 자체가 사라진 것도 같고요. 2002년에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은 진보적 사회단체와 지식인을 비판하는 열정(?)이 있었다는 게 참 낯설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문성욱은 월드컵에 관심 없는 자기를 비난하는 ‘여자애들’이 평소에는 축구를 싫어하는 ‘그 애들’이었다고 토로하는 반면, 권명환은 “이번 축제는 새로운 문화 출현의 신호탄”이라고 긍정하며 그 대표적 예로 ‘여성의 참여’를 듭니다. 통상적으로 축구는 그 에너지와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남성들의 욕망이 주로 반영된 스포츠였지만 이번 축제에 참여한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았고 다양한 패션을 주도했으며 대담한 응원과 열정을 선보였다고 보았죠. 그러면서 “이것은 남성 위주의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파워 넘치는 활력을 동일시한 개개인이 자신감을 얻고 에너지를 내면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평가”합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한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 및 코칭스태프가 대통령과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는 문성욱의 따끔한 지적이 떠오르면서도, 광장의 축제로 타자와의 관계 맺기 방식이 유연해질 기회가 열렸으며, (이미 20년 전에) “여성의 연대 가능성”을 내다본 권명환의 통찰이 놀랍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오늘’의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우승할까요, ‘내일’의 음바페가 있는 프랑스가 우승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