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오늘’의 내가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가 ‘오늘의 내 책’을 결정하나 봅니다. (연극 <레드>를 보고 난 후인지, 십여 년 전 마크 로스코 展을 보고 품게 된 질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왜 마크 로스코는 ‘비극’을 이야기할까”라는 질문 또한 가지고 있었고 ‘비극’이라는 큰 단어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비극의 탄생』을 출판사 ‘읻다’에서 낸 김출곤/박술의 공동번역본으로 읽으며 빠져들었어요. 박술 번역가께서 시인이어서일까요, 번역어 문장인데도 운율이 느껴졌고 읽기가 마치 춤추는 행위처럼 흥겨웠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다는 또 다른 버전을 종이책으로 주문했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도착해, 받자마자 상자를 뜯어 의미가 모호했던 부분부터 찾아 읽었습니다. 내가 찾던 ‘비극의 의미’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주었던 그 부분을.
강함의 염세주의는 존재하는가? 행복으로부터, 넘쳐나는 건강으로부터, 그리고 생의 충만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가혹함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악함과 문제적인 것에 대한 지적인 욕구는 존재하는가? 혹시 충일함 자체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적으로서 만나기를 원하는 도전적인 용기, 즉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호적수로서 만나기를 원하며 이 적에게서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를 원하는 가장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도전자의 용기는 존재하는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하며 용감했던 시대의 이 그리스인들에게 비극적 신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_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아카넷, 2007, 14-15쪽.
강함의 염세주의라니. 쇠락하는 인류가 밝은 전망을 꿈꾸는 낙천주의자가 되는 반면 건강이 넘치고 생의 충만함을 누리는 인류야말로 삶의 가혹함과 두려움에 대해 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공포를 배우기 원하는 염세주의자 아니겠는가,라는 니체의 질문은 제 마음속을 헤집어놓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니지만 21세기 현대인인 제 마음에도 ‘비극’이라는 호적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더라고요. 뒤집어 말하면 저도 고대 그리스인처럼 생의 충만함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으로서 온갖 공포와 악, 파멸의 신화를 갈망하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극의 의미’는 그 탄생 배경에서부터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즉 비극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어쩌면 기쁨으로부터, 힘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건강으로부터, 과도한 충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닐까?
_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아카넷, 2007, 22쪽.
그렇다면 『햄릿』이란 비극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영화 <햄넷>에서 시작한 이 기획이 어쩌다 보니 오래전에 본 연극 <레드>와 마크 로스코 전시를 거쳐 니체의 『비극의 탄생』까지 이어지며, 더 읽고 더 생각하며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의지’는 어디에서 피어오르는 걸까요?
아직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과 다음 주 금요일, 작고 아늑한 방에서 이루어지는 공부와 낭독의 밤, 그 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