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얼마나 고귀한 정신이 무너졌나!
조신, 군인, 학자의, 눈, 혀, 칼이요
아름다운 이 나라의 희망이요 꽃이며
예절의 거울이고 행동의 표본이요,
모든 존경의 귀감이 아주아주 쓰러졌어!
그리고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여인,
그의 음악 같은 맹세의 꿀을 빨던 내가
지금은, 고귀한 최고 군주요
상쾌한 종소리 같던 이성이 불화하고 혼탁함을,
활짝 핀 청춘의 비할 바 없던 형체가
광기로 시듦을 보는구나. 아, 내 신세,
볼 만한 걸 보고 나서 못 볼 것을 보다니.
_오필리아의 말, 윌리엄 셰익스피어(최종철 역), 『햄릿』(민음사), 3막 1장 중
『햄릿』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입니다. 그 유명한 햄릿의 “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도 이 3막 1장 초반에 나오는데 그 말보다도 오필리아의 이 말들이 제게 깊이 새겨졌거든요. 여자들이란 “삐딱빼딱 걸음에 혀짜래기소리 내며, 아무 데나 별 이름을 다 붙이고, 변덕을 무식으로 치부하지”라며 온갖 여혐 발언을 늘어놓고선 수녀원으로 꺼지라고 막말하는 햄릿에게 오필리아는 도리어 빛나는 은유로 말합니다.
당신은 조신의 눈, 군인의 칼, 학자의 혀를 가진, 고귀한 정신을 지닌 최고 군주였다고. 상쾌한 종소리 같던 이성으로 활짝 핀 청춘이었다고. 오필리아의 맑은 시선으로만 짐작해볼 수 있는 (생략된 과거의) 햄릿 모습입니다. 지금 햄릿이 얼마나 무너져버렸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전부터 그의 본질을 보고 사랑했던 오필리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오필리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햄릿이 광기로 시들고 나서야 전하는 뒤늦은 사랑고백 같은 말들. 비록 가부장 정치 권력의 수단이 되어 왕과 자신의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이 ‘극 속의 극’ 상황에서도 감출 수 없이 터져 나온 진심의 말들.
오필리아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려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애정하는 아티스트 심규선의 ‘오필리아(https://youtu.be/aqesscW6LY8?si=CmptyzzEGYLnd7sV)’가 있었어요. 가사에 매혹되어 수백 번은 반복해 들었을 이 곡에서 아티스트가 표현한 오필리아의 마음은 불가능한 상황/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도, 음악 같은 맹세의 꿀을 달게 빨았던 그때처럼 자기를 찢기고 할퀴는 낱말들을 달게 받겠다는 사랑의 다짐 같습니다.
부유한 노예, 녹지 않는 얼음
타지 않는 불, 날이 없는 칼
화려한 외면, 피 흘리는 영혼
하나인 극단, 그것들의 시
나는 녹지 않는 얼음으로 당신을 조각해서 두 팔로 끌어안고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내 미련함을 탓해도 돼요 가슴이 시려와도 나는 기쁠 거예요
그래 녹지 않는 얼음처럼 아픔을 마비하고 고통을 무감케 해 함께 할 수 없을 거예요 서로를 찢고 할퀼 거예요 가슴이 시려와도 나는 모를 거예요
그대의 낱말들은 그대의 낱말들은
_심규선, ‘오필리아’ 가사 중 일부
이 가사에서, 역설과 은유로만 말해질 수 있는 햄릿과 오필리아의 관계를 봅니다. 오필리아의 말 속에 구현된 눈, 혀, 칼의 은유를 다시 사용해 마음을 표현한 이 가사는 이후에 진짜 광기에 사로잡힐 오필리아의 혼란스러운 내면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해줘요. 어떤 고전은 이처럼 동시대 예술가의 해석으로 더 깊이 읽힙니다. 영화 <햄넷>이 『햄릿』을 더 깊이 읽게 만들어준 것처럼. |